개봉 24일 만에 800만 관객.
2026년 여름, 약 2,800년 전 이야기가 다시 극장을 채우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디세이》는 8월 28일까지 국내 누적 관객 801만 7,492명을 기록했습니다. 2026년 개봉작 가운데 가장 빠른 800만 돌파입니다.
영화 한 편의 상영시간은 172분 23초.
그런데 영화보다 훨씬 놀라운 숫자가 하나 있습니다.
그 출발점이 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약 2,800년 동안 사람들에게 전해져 온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귀향에는 다시 10년이 걸립니다.
그 사이 그는 외눈박이 거인을 만나고, 동료들이 돼지로 변하고, 죽은 자들의 세계까지 내려갑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자기 몸을 돛대에 묶기도 하고, 결국 함께 출발했던 동료를 모두 잃습니다.
그런데 《오디세이아》를 정말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괴물의 숫자가 아닙니다.
오디세우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괴물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집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명한 장면 몇 개만 골라보지 않겠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왜 집을 떠났고, 왜 10년이나 돌아오지 못했으며, 마지막에는 어떻게 자신의 집과 가족을 되찾는지 주요 장면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 이 글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주요 줄거리와 결말을 포함합니다. 2026년 영화의 구체적인 장면이나 연출 비교는 다루지 않습니다.
전쟁은 10년, 그런데 집에 가는 데 다시 10년
먼저 시간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작은 섬나라 이타카의 왕입니다. 아내는 페넬로페, 아들은 텔레마코스입니다.
그가 집을 떠난 이유는 트로이 전쟁이었습니다. 전쟁 자체가 무려 1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트로이가 무너지고 다른 그리스 영웅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오디세우스에게도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입니다. 이타카로 돌아가 페넬로페와 아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귀향이 다시 10년을 잡아먹습니다.
즉 그가 이타카를 떠나 있는 시간은 모두 약 20년입니다. 아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가 떠날 때 갓난아이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올 때는 이미 청년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오디세이아》의 중요한 질문 하나가 시작됩니다.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과연 예전에 떠났던 바로 그 사람일까요?
그런데 《오디세이아》는 여행의 출발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의외의 사실이 있습니다.
《오디세이아》를 펼친다고 곧바로 트로이에서 출항하는 오디세우스가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이미 거의 끝나 있습니다.
그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칼립소의 섬에 붙잡혀 있습니다.
반대로 이타카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20년 가까이 돌아오지 않자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구혼자들이 그의 궁전을 차지하고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오디세우스의 음식과 재산을 마음대로 소비하며 궁전을 자기 집처럼 사용합니다.
아들 텔레마코스는 이제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 이들을 몰아낼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한쪽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찾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돌아가려고 합니다.
《오디세이아》는 처음부터 이 두 개의 귀향을 함께 움직입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데도 오디세우스는 왜 떠났을까?
오디세우스가 머물고 있던 곳은 님프 칼립소의 섬 오기기아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무려 7년을 보냅니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사랑하고 그가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머문다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삶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합니다.
폭풍도 없고,
전쟁도 없고,
괴물도 없습니다.
아름다운 섬에서 영원히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거절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불멸이 아니라 이타카였습니다.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는 자신의 집이었습니다.
결국 신들의 명령을 받은 칼립소는 그를 보내줍니다.
오디세우스는 다시 바다로 나갑니다. 그리고 파이아케스 사람들의 땅에 도착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의 지난 10년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됩니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직접 들려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괴물보다 먼저 찾아온 위험, 고향을 잊게 만드는 로토스
오디세우스 일행이 만나는 위험이 언제나 무시무시한 괴물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위험은 오히려 너무 편안합니다.
로토스를 먹는 사람들의 땅에서 일부 동료가 로토스를 맛봅니다.
그 순간 그들은 귀향하려는 마음을 잃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이유도, 항해를 계속할 이유도 잊어버립니다. 오디세우스는 그런 동료들을 억지로 배에 태워 떠납니다.
이 장면은 짧지만 《오디세이아》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폭풍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 — 키클롭스와 오디세우스
그러나 가장 유명한 모험 가운데 하나는 역시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와의 만남입니다.
오디세우스와 동료들은 거대한 동굴에 들어갑니다.
먹을 것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동굴의 주인은 거인 폴리페모스였습니다.
폴리페모스는 거대한 돌로 입구를 막고 오디세우스의 동료들을 잡아먹기 시작합니다.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머리를 씁니다.
거인에게 술을 먹인 뒤 자신의 이름을 묻자 이렇게 속입니다.
자신의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라고.
폴리페모스가 잠들자 오디세우스와 동료들은 그의 하나뿐인 눈을 찌릅니다.
비명을 들은 다른 키클롭스들이 동굴 밖에서 묻습니다.
“누가 너를 해치고 있느냐?”
폴리페모스는 대답합니다.
“아무도 나를 해치고 있지 않다.”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디세우스의 꾀가 성공한 것입니다.
다음 날 그는 동료들과 함께 양의 배 아래에 몸을 숨겨 동굴 밖으로 빠져나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완벽한 승리입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마지막에 결정적인 실수를 합니다.
승리한 오디세우스는 왜 굳이 자신의 이름을 외쳤을까?
배가 거인의 손에서 벗어났을 때 오디세우스는 참지 못합니다.
자신을 속인 사람이 누구인지 폴리페모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외칩니다.
오디세우스.
이타카의 왕.
폴리페모스는 그제야 자신을 공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문제는 폴리페모스의 아버지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라는 것입니다.
폴리페모스는 아버지에게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방해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결국 오디세우스의 영리함이 그를 살렸지만,
그의 자존심은 다시 긴 고난을 불러옵니다.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는 완벽한 영웅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인 영리함과 가장 위험한 약점인 자만심을 동시에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키클롭스의 섬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의 귀향은 훨씬 빨라졌을까요?
고향이 눈앞에 있었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다
바람을 다스리는 아이올로스는 오디세우스에게 특별한 자루 하나를 줍니다.
그 안에는 항해를 방해하는 바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좋은 바람을 타고 배는 마침내 이타카 근처까지 옵니다. 고향의 불빛이 보일 정도였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지쳐 잠이 듭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자루 안에 보물이 들어 있다고 의심합니다. 몰래 자루를 열어버립니다.
순간 갇혀 있던 바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고향이 눈앞에 있었던 배는 다시 먼 바다로 떠밀립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집인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오디세이아》에는 이런 순간이 계속 등장합니다.
귀향을 방해하는 것은 신과 괴물만이 아닙니다.
오디세우스 자신의 실수, 그리고 동료들의 욕심과 불신도 여행을 길게 만듭니다.
사람을 돼지로 만든 키르케, 그런데 1년이나 머물렀다
다음으로 만나는 존재는 마녀이자 여신인 키르케입니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동료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그들을 돼지로 바꿉니다.
오디세우스는 신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아 마법을 피하고 결국 동료들을 인간으로 되돌립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은 그다음입니다.
위험에서 벗어났다면 곧바로 출항할 것 같지만 일행은 키르케의 섬에서 약 1년을 지냅니다.
먹고 마시며 편안하게 생활합니다. 결국 먼저 귀향을 떠올린 사람들은 동료들입니다.
“이제 집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디세우스에게 다시 출발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키르케는 집으로 돌아가려면 먼저 죽은 자의 세계로 내려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나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죽은 자들의 세계까지 내려가다
오디세우스는 살아 있는 몸으로 저승으로 향합니다.
여기서 그는 죽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앞으로의 길을 묻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더 충격적인 사람도 만납니다. 자신의 어머니입니다.
오디세우스가 전쟁과 바다를 떠도는 사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어머니의 죽음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도 만납니다.
전쟁터에서는 최고의 영웅이었던 사람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영광스러운 죽음보다 살아 있는 평범한 삶이 더 낫다는 생각입니다.
모험담처럼 달리던 이야기가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춥니다.
오디세우스가 돌아가고 싶은 것은 단순한 왕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세계,
바로 그 유한한 삶 속의 자기 자리입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었던 남자
다시 항해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장면 가운데 하나인 세이렌이 등장합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선원은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배를 난파시킵니다.
피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귀를 막으면 됩니다. 오디세우스는 동료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귀는 막지 않습니다. 노래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자신을 배의 돛대에 단단히 묶으라고 명령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풀어주지 말라고 합니다.
세이렌의 노래가 들리자 예상대로 오디세우스는 풀어달라고 몸부림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동료들은 계속 노를 젓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바다를 빠져나갑니다.
이 장면이 재미있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유혹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대신 자신이 유혹에 빠질 것까지 예상해 스스로를 묶어놓습니다.
여기서 독자에게도 질문할 수 있습니다.
위험한 것을 아예 보지 않는 것과, 자신의 약함을 알고 안전장치를 만든 뒤 경험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지혜로운 선택일까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정답이 없는 선택
이제 오디세우스에게 훨씬 잔인한 선택이 찾아옵니다.
한쪽에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스킬라가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배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 카리브디스가 있습니다.
두 위험 사이를 통과해야 합니다. 완전히 안전한 길은 없습니다.
카리브디스 쪽으로 가면 배 전체를 잃을 수 있습니다.
스킬라 가까이 가면 일부 동료가 희생될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오디세우스는 스킬라 쪽을 선택합니다.
여섯 명의 동료가 목숨을 잃습니다.
영웅이 모든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누군가를 잃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라는 이야기는 어느 쪽을 골라도 위험한 선택의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끝내 금기를 어긴 동료들, 그리고 혼자 남은 오디세우스
테이레시아스와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 한 가지를 거듭 경고했습니다.
태양신의 소를 건드리지 말 것.
하지만 오랜 항해 끝에 식량이 떨어집니다.
배는 섬에 발이 묶입니다.
오디세우스가 잠든 사이 굶주린 동료들은 결국 금지된 소를 잡아먹습니다.
대가는 큽니다.
다시 바다로 나간 배는 신들의 분노 속에서 파괴됩니다.
동료들은 모두 죽습니다.
트로이에서 함께 출발했던 사람들 가운데 오디세우스만 살아남습니다.
그렇게 홀로 떠돌다 도착한 곳이 바로 칼립소의 섬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7년.
이제 우리는 이야기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디세이아》의 초반에 보았던, 바다를 바라보며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던 오디세우스입니다.
10년 만에 도착한 이타카, 그런데 왜 거지로 변장했을까?
마침내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에 도착합니다.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 “내가 돌아왔다”고 외치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신 아테나의 도움으로 늙은 거지의 모습으로 변장합니다.
왜일까요?
20년 사이 자신의 집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여전히 자신에게 충성하는지,
누가 배신했는지,
아내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 텔레마코스를 만납니다.
아버지가 떠날 때 갓난아이였던 아들입니다.
처음에는 정체를 숨기지만 결국 자신이 아버지임을 밝힙니다.
20년 만의 부자 재회입니다.
이제 두 사람은 함께 궁전을 되찾을 계획을 세웁니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늙은 개는 주인을 알아봤다
궁전으로 향한 오디세우스는 여전히 거지 모습입니다.
아무도 왕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 존재가 그를 알아봅니다.
늙은 개 아르고스입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 떠나기 전 길렀던 개입니다.
세월이 흘러 아르고스는 늙고 쇠약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20년 만에 돌아온 주인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를 다시 본 뒤 죽습니다.
괴물도,
신도,
전투도 등장하지 않는 짧은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디세이아》 전체에서도 유난히 오래 기억되는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독자는 이 늙은 개 한 마리를 통해 실감하게 됩니다.
페넬로페는 정말 20년 동안 기다리기만 했을까?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를 단순히 ‘남편을 기다린 정숙한 아내’라고만 기억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 페넬로페 역시 상당히 영리합니다.
구혼자들이 재혼을 압박하자 그녀는 한 가지 조건을 겁니다.
시아버지 라에르테스의 수의를 다 짠 뒤 결혼하겠다는 것입니다.
낮에는 베를 짭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낮에 짠 것을 다시 풀어버립니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 남편의 귀환을 기다립니다.
오디세우스가 꾀로 살아남았다면,
페넬로페 역시 꾀로 자신의 집과 선택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은 생각보다 닮았습니다.
아무도 당기지 못한 활을 거지가 들어 올리다
마침내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에게 시험을 제안합니다.
오디세우스가 사용하던 활입니다.
그 활을 당겨 정해진 과녁을 통과시키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구혼자들이 한 명씩 도전합니다.
하지만 활시위조차 제대로 당기지 못합니다.
그때 늙은 거지가 활을 잡습니다.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그러나 거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활시위를 당깁니다.
그리고 화살을 정확히 날립니다.
바로 그 순간,
오디세우스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이후 아들 텔레마코스와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궁전을 차지하고 있던 구혼자들을 처단합니다.
왕은 마침내 자신의 집을 되찾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걸까요?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페넬로페입니다.
남편이 돌아왔는데 페넬로페는 왜 바로 믿지 않았을까?
20년 만에 남편이 나타났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오디세우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페넬로페는 쉽게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시험을 합니다.
두 사람의 침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침대를 방 밖으로 옮기라고 말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즉시 반응합니다.
그 침대는 옮길 수 없다고.
왜냐하면 그가 살아 있는 올리브나무를 중심으로 직접 침대를 만들었고, 그 주위에 방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은 두 사람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제야 페넬로페는 눈앞의 남자가 정말 오디세우스임을 받아들입니다.
이 장면을 생각해보면 귀향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 땅에 발을 디뎠다고 해서 귀향이 완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을 되찾고,
아들과 다시 관계를 맺고,
아내에게 자신의 정체를 확인받아야 했습니다.
《오디세이아》에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장소로 돌아가는 일이면서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 다시 확인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는 정말 좋은 영웅일까?
여기까지 읽으면 오디세우스가 영리하고 용감한 영웅처럼 보입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하지만 불편한 장면도 적지 않습니다.
키클롭스에게 굳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 포세이돈의 분노를 불러옵니다.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세이렌의 노래를 듣겠다고 합니다.
여러 위험 속에서 수많은 동료가 죽고 결국 혼자만 귀환합니다.
이타카에 돌아온 뒤에는 구혼자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합니다.
그래서 《오디세이아》를 읽을 때 꼭 “오디세우스는 위대한 영웅이다”라는 답에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그의 용기와 자만은 어디에서 갈라질까요?
영리함과 속임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리더는 동료들의 선택에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요?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고전이 오래 남는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괴물이 많은 이야기인데 결국 ‘집’ 이야기인 이유
키클롭스.
마녀 키르케.
저승.
세이렌.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신들의 분노.
《오디세이아》에는 정말 많은 모험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장면을 하나로 연결하는 단어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집’입니다.
로토스는 집을 잊게 만듭니다.
칼립소는 집 대신 영원한 삶을 제안합니다.
세이렌은 항해를 멈추게 합니다.
포세이돈은 귀향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이타카에 도착한 뒤에도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집을 다시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노스토스(nostos)’입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귀향’, 즉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일리아스》가 전쟁터에서 영웅이 어떻게 싸우는지를 보여준다면,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난 뒤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약 2,800년 전 이야기가 2026년 극장으로 돌아온 이유
2026년 여름, 수백만 명의 한국 관객이 극장에서 다시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유명한 괴물보다 훨씬 오래 남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어도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모두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노래를 한 번쯤 들어보고 싶은가?
고향이 눈앞인데 동료의 실수로 다시 멀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20년이 지난 뒤에도 나는 예전의 나일까?
그리고 나를 기다리던 사람은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영화가 현재의 관심을 열었다면 원작은 그 질문을 훨씬 더 멀리 데려갑니다.
그래서 리드누리에서는 영화를 보고 “원작이 그리스 신화였구나”에서 멈추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디세우스가 왜 길을 잃었는지,
어떤 선택이 그를 살렸고 어떤 선택이 여행을 더 길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결국 그가 무엇을 찾아 돌아왔는지까지 따라가 봅니다.
학생과 함께 읽는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오디세이아》를 읽고 등장하는 괴물의 이름을 외우는 것도 하나의 공부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질문할 때 더 재미있어집니다.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에게 이름을 밝힌 것은 용기였을까, 자만이었을까?
나라면 불멸을 주겠다는 칼립소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오디세우스처럼 세이렌의 노래를 들어보고 싶을까?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서 일부를 희생시키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페넬로페가 남편을 바로 믿지 않은 것은 의심이 많아서였을까, 현명해서였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내가 20년 동안 집을 떠났다가 돌아왔다면 무엇이 있어야 그곳을 여전히 ‘내 집’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하나의 정답이 없습니다.
작품 속 장면을 근거로 서로 다른 답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줄거리를 안 다음에 시작되는 읽기입니다.
영화가 끝난 뒤 원작을 읽어야 하는 이유
172분짜리 영화가 끝나도 《오디세이아》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원작에는 영화 한 편의 장면으로만 정리하기 어려운 수많은 이야기와 질문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이 오래된 작품에서 오늘의 우리와 비슷한 마음도 발견하게 됩니다.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고 싶은 마음.
유혹을 알면서도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
성공한 뒤 자기 이름을 알리고 싶은 마음.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가족에게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
신과 괴물이 등장하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감정은 상당히 인간적입니다.
그래서 약 2,800년 동안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오디세우스는 10년에 걸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긴 여행을 따라간 뒤 오히려 처음보다 더 단순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사람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자료 확인